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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그내의 삶

발에 입맞춤

둥그내 2022. 8. 13. 13:43

“엄마는 엄청 더울 때 태어나셨네”

언젠가 가볍게 건넨 말에
엄니가 들려준 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

주민등록번호를 위해 생일을 아는 게 필요했을 때
엄니의 엄마가 세상에 없어서 그냥
음력 7월15일을 엄니 생일로 스스로 정했단다.

일제시대와 6.25를 뚫고 91년을 이 땅에서 살아낸
한 여인의 삶에는 나이테와 나무 옹이 같은 감정이
켜켜히 새겨져 있다.

깊이 사랑받은 기억이 없는 엄니의 내면은
만날 때마다 주로 억울함을 호소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씩 달라져갔다.

용돈을 드리면 전에는 미안함이 먼저 튀어나왔었는데
요즘은 쓰윽 받으며 고맙다 먼저 하시고는
“미안해, 너무 오래 살아서” 가 뒤를 잇는데
그 뉘앙스가 ‘나두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지~~~롱’이다. 😂
(엄청 귀여우셨음)

병원 모시고 다녀온 날은 점심을 먹는 동안
남편과 자신을 이간질하는 시어머님에게
“저에게 직접 말씀하시라” 맞짱 뜬 얘기를 들려주셨다.
(속이 시원~~했음😁)

지인과 의리 지킨다고 엄니가 몸을 혹사한 이야기를
언니들이 고자질하기에
“아니, 엄마가 엄마 몸을 애껴주지 않고 혹사했다고??
엄마 아주 혼구멍이 나야겠네!” 했더니
고개를 숙이고 어린 아이처럼 조용히 듣고 계신다.
(아우, 사랑스러워🥰)

어제 헤어질 때 포옹 함 합시다 했더니
전에는 쑥쓰러워하며 살포시 안기셨다면
어제는 내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꽈악 안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좋은 걸 마음껏 표현하셨다.

코로나로 못 가던 성당을 이제 다시 나가신단다.
기도문 외우기 전
묵주에 달린 십자가 세로축 끝에 입맞춤을 하는데
예수님 발에 하는 입맞춤이라고.
한 존재의 발에 입맞춤을 하려면 자연스레
몸과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장면은 언제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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