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억울함에 공감하지 못하던 나를 며칠 동안 탐구했다.
왜 그랬을까?
A가 억울함을 느끼는 사건과 대상 B에 대해 말할 때
그 사건과 B에 대해 나는 어떤 억울함도 없고
그러다보니 나의 다른 견해를 A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A가 느끼는 ‘억울함’이라는 감정 에너지 자체에
순수하게 머무르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오로지 나의 견해를,
사건과 B에 대해 내가 쌓은 ‘상’과 ‘관념’을 계속 말하는
‘고집스러운 나’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뭣이 중헌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앞에 앉아 있을 땐 그 억울함의 에너지,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폭발 에너지가 잘 흘러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중허지
도대체 나의 견해가 무에 중헌가.
내 밑에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었나.
편하지 않은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이 있었다.
불편을 문제로 느끼고 불안하다 여기는 꼬맹이가 있었다.
큰 형부가 세째 언니랑 싸우다가 TV를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칠 때
곤히 자다가 영문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잘못했다고 빌던 꼬맹이
불편한 상황이 되면 두려움 때문에 감정을 닫아걸고
‘빌어서라도’ 빨리 모면하고 싶어하던 꼬맹이
내 안의 꼬맹이에게 다가가
“걱정마. 이젠 제법 잘 싸우는 이 언니가 있잖아!” 편을 들어주고 나니
최근 숙고하던 마미즘(momism)과 연결되어 불꽃이 번쩍 일었다.
좌뇌형이 우뇌형 타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자꾸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들고
감정에 함께 머무는 게 중요한 우뇌형은 이를
자신에 대한 컨트롤로 받아들인다.
우뇌형의 감정에 함께 머무르고 지지하고 나면
그 감정이 스스르 녹아서 풀리고 알아서 자기 길을 간다.
좌뇌형이 우뇌형의 신성을 믿고 맡길 때 첫 단추는
‘감정에 함께 머무르고 지지하는 것’
자신의 견해를 말하면서 은연 중에 해결책으로 가지 말고.
4년 동안 깊이 고민했던 주제가 시원하게 풀려나갔다.
A에게 나를 고백하고 바로 공감을 행했다.
통화를 끝냈을 때 시각이 4:44
다음 날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누는 동안
A의 몸에 갇혀 울부짖던 억울함이라는 에너지가
힘차게 밖으로 흘러 빠져나가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 후 A에게서 절로 통찰이 일어나고 B를 바라보는 관점에 전환이 일어났다.
A의 신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생하게 감지되었다.
그 순간은 정말.. 아름답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은 이런 순간이 아닐까..
A의 신성에
B의 신성에
나의 신성에
우리 모두의 신성에
엎드려 절한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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