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My Way Home 집으로

몰라서 재밌다

불확실성을 가능성으로 본다, 뻗어나간다

둥그내 치유&성장 일기

정미가 나타났다

둥그내 2020. 9. 12. 14:50

어제 명리 스승님이 보내주신 녹화 자료로
재미있게 공부를 하며 

천간 10글자 

그 중 수화목금 음양(질과 양) 8 글자와 무기토가 의미하는 바 

그 공들이 색이 되어 표현되는 12지지 

그 각 글자들을 왜 '신'이라 부르는지에 대해 

적묵의 시간을 보내며 어떤 통찰이 일어났다.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출출함이 밀려와 찐 옥수수를 하나 먹고 

기본소득제와 지역화폐와 관련된 국제포럼을 보며 

김치찌개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등에 통증이 느껴져 드러누웠다. 

천천히 움직이며 풀어주었으나

왼쪽 종아리 좌측 안쪽에서 느껴지는 

말할 수 없는 냉기 

어떻게 해도 빠져나가지 않는 냉기로 

가슴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 되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서도 그 냉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간밤에 또 쥐가 나려나?' 

잠시 생각이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쉬이 잠이 들었다. 

 

난생 처음 꿈에 정미가 나타났다. 

 

정미는 내 어린 시절 둘도 없는 동네 친구다. 

우리집에서 크게 15걸음을 가면 정미네 집에 닿았다. 

정미네 집에는 책이 많았다. 

정미네는 피아노가 있었다. 

정미네 집에는 라면이 박스로 쌓여 있었다. 

정미네 집에는 가끔은 짖궂어도 그마저도 

하나 뿐인 여동생에 대한 사랑임을 느낄 수 있는 

세 명의 오빠들이 있었다. 

정미네 집에는 웃음과 목소리가 밝고 능력 있는 아빠가 있었다. 

정미네 집에는 그 대식구를 품고도 미소 짓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정미네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나의 언니는 친구들과 노는 게 방해될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를 골방으로 쫓아냈지만 

정미네를 갔더니 그 집 식구들을  나를 반겼다. 

정미네 오빠들 뜨신 방에 배깔고 누워

밤새도록 함께 만화책을 보았다.

아침에 방문을 여니 마당에 눈이 소복히 내려 있었다. 

나는 집에 가기가 싫었다. 

 

정미가 사촌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책을 읽었다. 

정미가 연주하다가 틀리고 피아노 배우기를 싫어하면 

나는 내가 그 자리로 가서 대신 배우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냥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연주를 듣다 보니 어느새 체르니 곡이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었다. 

엄마에게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 했더니 

피아노는 한 달에 16,000원 

주산은 한 달에 9,600원 

너는 어차피 여상을 가서 일찍 취질할 테니 

주산을 배우라고 했다. 

 

겨울방학 때 입장료 800원을 내고 

정미와 정미 막내 오빠와 함께 

생전 처음 스케이트를 타던 날 

정미는 예쁜 피겨스케이트를 신고 빙빙 돌고

나는 날이 녹슨 롱스케이트를 얻어 신고 

중심 잡는 게 너무 힘이 들어 

100번 정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간신히 몇 바퀴를 돌았다. 

그러고 정미네 집으로 함께 갔다. 

정미 오빠가 장수면을 끓여주었다. 

스케이트에 발뒤꿈치가 다 까져서 피가 나니 

대일밴드도 붙여주었다. 

아직까지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이 장수면이다. 

 

그 겨울 정미네 집으로

정미 아빠가 회사에서 가져온 베아링을 실어 나르던 날 

구루마에 싣고 나르는 그 일을 열심히 도왔다. 

나는 마치 그 가족의 일원이 된 거 같았다. 

신이 났다. 

집에는 가기가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미 방에서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맞은 편에 있는 안방에서 문풍지를 뚫고 들려오는 속삭임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칭찬하고

정미에게는 너도 책 좀 보라 잔소리를 하여 

정미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했던 정미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강희는 아빠가 없어서 그런지 얼굴에 그늘이 있어. ㅉㅉㅉ"

 

산산이 부서졌다. 

내 꿈속의 가족이. 

나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너는 그 조건에서도 그것밖에 못하는가 

은근히 정미를 내려다보던 나의 우월감

나는 이 조건에서도 이만큼 해낸다

은근히 뿌듯해하던 자존심 

 

그 감정이 순식간에 열등감으로 변했다. 

나는 내가 속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정미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몇 년 지나 15분 남짓 걸어가야하는 

더 큰 한옥집으로 정미네는 이사를 갔다.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비엔나 쏘세지 한 봉을 사도 

조카들 등살에 몇 개 싸가지를 못하는 내게 

그거라도 넉넉히 싸주고 싶은 마음에 

정미 엄마의 파출부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미네 이사가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했다. 

어쩌면 엄마가 그 집 살림을 돕고 있어도 

나는 당당할 수 있는가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한옥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섰다. 

부엌에서 나온 엄마와 마주쳤다. 

어색한 눈빛을 주고 받은 후 정미 방에 들어갔다. 

 

정미는 그림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커다란 스케치북에 정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며 

정미가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음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그 집의 엄청나게 많은 빨래들을 

그 급한 성격에 신속하게 해내느라 

탈수기가 다 멈추기도 전 기계 뚜껑을 열었다가 

왼쪽 가운데 손가락이 부러졌다. 

걸레에 잘린 손가락을 둘둘 말아

집에 온 엄마는 그후 경희의료원에 입원해

고압산소기에 두 번 들어갔어도 

봉합한 손가락이 죽어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엄마는 결국 잘려나간 손가락을 포기하고 

가운데 마디에서 봉합을 했다. 

고3이라고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엄마가 어디 갔노라 하고는 자기들끼리 쉬쉬하는 걸 

내가 추궁해 알아냈다. 

 

엄마의 잘린 손가락을 보며 오만 가지 감정이 일었다. 

 

연민 분노 사랑 짜증 고통 원망 절망... 

 

얼굴이 얼어 붙었다. 

 

여름 방학 하필 학교 도서관이 공사 때문에 휴관한다하고 

집구석은 큰 형부 실업상태라 부업 일감이 장악하고 있고 

제발 사설 도서관에 한 달만 있게 해달라 간절하게 내뱉었는데

그때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후문 앞에

꼬깃꼬깃 떨어져 있는 지폐를 발견했다.

15,000원이었다. 

엄마에게 15,000원만 보태달라 했다. 

엉덩이에 종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공부했다. 

선지원후시험으로 제도가 바뀌어 학력고사가 한 달 미뤄지면서 

나는 그 시간을 금쪽 같이 썼다. 

서울대에 합격했고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갔다가 

혹 불합격이면 한강 건너오며 내가 나쁜 마음 먹을까봐 

정미 막내오빠에게 알아봐달라 부탁한 엄마는 

합격 소식을 듣고 동네 길에 나가 춤을 추었다. 

 

정미는 미대를 들어갔고 아트박스 디자이너로 취직을 했다. 

이번에는 장위동으로 이층 정원 딸린 양옥집으로 이사를 간 

정미를 찾아갔다. 

 

정미는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2층 거실 

모래가 들어 있어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1인용 소파에 적당히 드러누워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 기집애는 참 복도 많구나. 

햇살마저 다 가진 듯 보이는구나. 

내가 처음 아파트를 장만해서 산 소파도 그렇게 생겼다. 

 

정미는 결혼도 잘 했다. 

세검정에 좋은 집을 마련했고 시댁도 빵빵하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주는 엄마에게서 부러움이 진동했다. 

 

그렇다. 

정미는 내게 낙원에 사는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아이다. 

정미는 내게 풍요 그 자체다. 

그리고 나는 그 풍요 속에 속했다고 착각했다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악착같이 이 악물고 

사회적으로 그 빈곤을 해결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심하게 방황을 거듭한 헛똑똑이다. 

 

어젯밤 꿈에 바로 그 정미가 나타났다. 

 

어떤 공간에 함께 있다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정미와 그 일행 하나가 차를 빼겠다고 먼저 주차장으로 가면서 

나더러 뒤따라 오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쫓아갈 생각이 아예 없었는지 

중간 중간 곳곳을 다 들리며 내 볼 일을 다 보고는 

'이제 주차장으로 가자. 찾을 수 있을라나' 한다. 

 

주차장으로 갔다. 

너무나 넓다. 

못 찾겠다. 

먼저 차를 끌고 나갔겠지?
연락할 방법이 있나?

아, 정미 전화번호가 내 휴대폰에 있지!  

잠시 헤매는 사이 ㄱㅎ샘과 ㅈㅇ샘이

오픈카를 타고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간다. 

신나게 지나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안녕히 가시라 축복한다. 

 

주차장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표지판을 가리키며 여기가 지하 1층이니 

한 층을 더 올라가시라고 한다. 

 

나선형으로 생긴 그 한층을 천천히 걸어올라간다. 

드디어 지상이다. 

정미가 먼저 가버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도로변을 두리번거린다. 

정미가 보조석 문을 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헤어스타일이 달라져 있었고 

오른쪽 긴머리를 귀 뒤로 넘겨

길다란 진주머리핀으로 슬쩍 고정한 모습 

 

"정미야~"

 

이름을 부르니 정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고개를 돌린 정미는 정미가 아니고 나였다.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청소기 웽웽대는 소리가 

정미가 나라니 

풍요가 나라니 

내가 정미라니 

내게도 이미 풍요가 있었다니 

랩으로 들리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기도가 흘러나왔다. 

 

네, 

제 몫의 풍요를 받을 준비가 되었나이다. 

 

 

벨이 울렸다. 

 

"택배요~"

 

글을 모두 마친 후 절묘한 타이밍에 

새 가방이 도착했다. 

 

 

 

'둥그내 치유&성장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지 않겠다  (0) 2020.09.15
섭리  (0) 2020.09.14
기쁨  (0) 2020.09.08
과감하게 말하기 - 속에서 자꾸 시킨다  (0) 2020.09.04
기도  (0) 202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