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그내 치유&성장 일기

‘그럴 수도 있지’에 담긴 함정

둥그내 2022. 6. 14. 14:11

아들이 어떤 선택을 앞두고 고민하는 두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두고 대화를 나누어 왔다. 

지난 수욜 자신의 결정을 알려왔고 나는 그 결정을 존중하며 그래도 마음이 좀 아프다고 했다. 

나의 표현에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일요일 정해진 시간에 대화를 나누며 물었다. 

엄마 맘이 좀 아프다고 할 때 어땠느냐고.. 

나는 내가 맘이 아프다고 표현한 것이 아이를 혹시 혼란스럽게 했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지..하고 생각했다."

 

어라..

이거 많이 듣던 표현이다. 

아, 내가 아이들 키우면서 줄창 한 표현이다. 

아이들의 여러 실수들에 대해 늘 그래왔다,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이번 대화를 기회로 비로소 깨닫는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로 재빨리 넘어가느라 그 순간에 아이들이 무엇을 느꼈는지 충분히 감정을 물어봐주지 못했다는 걸.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 대해 서로가 느낄 수 있는 감정적 소통 없이 빨리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나 자신도 빨리 안심하기 위한 표현이 '그럴 수도 있지'였구나.

과정이 사라진 채 바로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엄마와 그 엄마의 아들이 닮았다는 게 어쩌면 참 당연하지 않은가. 

우린 둘의 소통은 대부분 인지적이다. 우린 둘 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에 무능하다. 

 

아이들에게 그럴 수도 있다고 해왔던 엄마로서의 나의 모습은 겉보기에 상당히 쿨해보였다. 

그럴 수도 있다는 표현은 얼핏 참으로 허용적이지 않은가.

38살 많은 엄마와 19살 많은 계모 같은 큰 언니로부터 따블로 잔소리를 듣고 간섭을 받으며 성장한 내가 만들어낸 대단히 허용적이고 쿨한 엄마의 모습이지 싶다.

그것이 내가 어린 아이로서 어른 가족들에게 경험한 훈육 방식과 내가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한 훈육 방식 사이의 차이이다. 

누구도 내게 '마음이 어떠냐' 묻지 않았듯 나도 내 아이들에게 '마음이 어떠냐' 묻지 않은 것, 이것은 공통점이다. 

나 역시 그럴 수도 있다는 말로 감정을 덮어버렸고 저 말이 지닌 허용적 의미에 취해 내가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빨리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버리는 아이의 심리에서 부정적 감정을 잘 처리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끼고 그건 고스란히 나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아빠 10살에 돌아가신 후 10년 간 나는 극단적인 기대와 실망 사이를 오고 갔다. 

내 공포와 수치심을 유발하는 핵심 인물이었던 큰 형부가 아빠의 빈 자리를 꿰차고 들어와 식구가 되어 가장 행세를 하고 엄마가 그를 가장 대접하는 동안 1년에 두어 번씩 엄마와 큰 언니가 대판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 엄마는 전세금 해줄 테니 집에서 나가라 하고 큰 언니도 나가겠다 외치며 긴 냉전이 펼쳐졌다. 

나는 그 냉전 기간 동안 내게로 쏟아지는 부정적 감정들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속으로 계속 빌었다. 

'그들이 집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그러나 특별히 더 감정쓰레기통이 되었던 냉전 기간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들은 계속 한 집에서 끈질기게 살아갔고 엄마는 그들이 안 나가는 걸 어쩌냐며 외려 내게 하소연하기를 수 십 번.. 

절망과 체념으로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남은 방식이 '그럴 수도 있지'였다. 

머리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이 방식은 꽤나 쿨하고 근사한 방식이라는 세간의 관점이 학습되면서 더 단단해져서 이 방식에 오랜 시간 내가 중독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 밑에 깔린 나의 불안을 마주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나는 겉보기에 대단히 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하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특별한 관계에 있고 그 관계에 있는 이가 감정적 지지와 공감을 강력하게 원하는 경우에는 바로 그 밑천이 들통나버린다. 

관계 속 당사자는 내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데서 오는 답답함, 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갑갑함 때문에 괴로워서 호소한다.

'벽에 대고 말하는 거 같다, AI랑 대화하는 거 같다.'

저런 말을 들은 나는 분명 당황하고 불안할 텐데 그 감정을 숨긴채 '당신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말해버린다. 

겉보기에는 각각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심지어 사과도 잘 하는 것 같으니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한 상대방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은 혼란에 빠져버리며 절망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표현에 경기를 일으키며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저 이해하는 듯한, 그들을 인정하는 듯한 표현으로 교묘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컨트롤하고 있다는 걸. 

그들의 반응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역동을 내가 허용하고나서야 내가 나를 같은 방식으로 컨트롤해왔음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은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스스로 부정적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라 생각하는 방향으로 집요하게 끌고가려는 이 아이러니. 이것이 내 위선의 한 측면이고 이것이 상대에게 이중적인 메세지를 보낸다. 허용하는 것 같은데 허용하지 않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내면의 부정적 감정을 다룰 줄 아는 방법을 스스로 배워가며 하나 하나 치유해내지 않는 한 이 위선은 계속 되겠지. 

공포와 절망 속에서 어른들의 빈말을 혐오하며 성장한 이 아이의 불안을 지극한 연민의 마음으로 달래주지 않는 한, 이 아이는 결국 '신의'에 집착하여 이랬다 저랬다하는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집을 피울 것이고, 다양한 존재 양식을 진심으로 존중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농담을 다큐로 받는 재미 없는 닭대가리에서 변화하지 못하지 싶다.

(대학 때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순진하다고 붙여진 별명이 닭대가리다. 어쩌면 못 알아듣고 싶었던 걸지도) 

 

그런 내게 스스로 내린 처방전은

1. 내면에서 일어나는 오만 가지 감정의 변화를 허용하면서 마음껏 변덕쟁이가 되어 보는 것 

2. 타인이 개인적으로 결정할 사안을 내가 이해하는 과정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여전히 유효 

3. 과정을 함께 하며 함께 결정을 내린 부분이 번복될 때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를 마음껏 허용하고 실망과 섭섭함을 마음껏 표현할 것 

 

EPT팀원과 에세네 공동체에 대한 나의 경험을 나누는 과정에서 뭐든 이해하려는 나의 습성이 길러온 빛과 그림자도 보게 되었다. 

공동체의 긍정적 측면을 간파하는 속도가 빨라서 마켓팅이나 홍보 등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건 빛

아쉬운 점 등은 부정적 감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측면인데 이 감정을 덮는 습이 있어 공동체의 입체적 발전에 기여하기는 취약하다는 건 그림자 

 

힐링스쿨 교재에 나오는 E&P 테스트에 따르면 2년 전의 나는 대단히 좌뇌형 인간이다. 

음양으로 따지자면 음인 성향이 강하다는 뜻 

좌뇌형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그 성향이 성장 과정에서 강화되었을 것 같다. 치유를 통해 어느 정도 중화를 이뤄나가게 될지 아니면 좌뇌형으로서의 소위 재능이 더 발현되는 쪽으로 진행될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 예측하기론 좌충우돌 진행될 거 같다. 

치유가 변화를 불러온다면 E&P 테스트 결과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