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분도 에고였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호모 스피리투스를 읽기 시작한 지 몇 개월이 되었다. 하루에 한 페이지 읽기도 벅찬 책이라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속도를 낼 필요도 못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 나는 멈추었다.
에고는 모든 부당함에서 젖을 짠다. 에고에게 ‘의분’에 탐닉하는 것보다 더한 쾌락은 없다. 에고는 그토록 굉장한 댓가를 지불하는 저 달콤한 위치성을 ‘사랑’할 뿐이다. - 호모 스피리투스 434쪽 –
분별을 사랑하는 에고가 의분, 의로운 분노,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분노에 탐닉한다는 말이 머리로는 분명 당연한 말로 들렸는데 내 몸은 충격에 휩싸였음을 알아차렸다.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머리와 가슴의 불일치, 분열.
내 삶을 지배한 핵심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우등상을 받고도 촌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애들 앞에서 담임에게 머리통을 얻어 맞았다. 10살에 나에게 유일하게 공감을 해주던 아빠가 돌아가신 자리에 나에게 성적으로 몹쓸 짓을 한 큰 형부가 들어와 가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 문화를 뼈 속 깊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엄마는 그 자에게만 계란찜을 해바친 것도 모자라 내가 애지중지 기르던 병아리가 중닭이 되었을 때 쥐가 물어갔다는 거짓말을 해가며 그 자에게 삼계탕을 해바쳤다. 조카들에게 사과를 깎아주다가도 조카들이 울면 내가 울렸다고 엄마에게 뺨을 맞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나의 유일한 보호자로 지켜야만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내게 상고 가서 일찍 취직해 돈을 벌어오려면 주산을 배우라고 해서 피아노를 포기했으면서도 엄마를 지키기 위해 아예 시집을 안 가겠다거나 시집을 가더라도 고아에게 가서 남편과 함께 엄마를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을 하며 성장했다. 실업자가 된 형부가 언니들과 싸우다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TV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면 자다가 놀라서 깬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 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불안한 상황에 평화를 불러오기 위해 내가 했던 행동은 찍 소리 않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 이해의 대상에 ‘나’는 없었다. 그들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억울함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하여 투사가 되었다. 어릴 때 쵸코파이나 연필을 선물로 받는 맛에 다녔던 개척교회가 건물을 세우고도 인건비를 지불하지 않아 노동자가 십자가와 자신의 허리를 묶고 대롱대롱 매달려 항의할 때 분노했다. 촌지로 학생 차별하는 선생들에게 분노했다. 학생들에게 성적 발언을 하며 모욕을 주고 얼토당토 않은 기물파손 혐의를 씌워 18명을 정학시키려던 교장에게 분노했다. 경영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은 노동자가 회사 사정에 따라 무자비하게 해고될 때 분노했다.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분노했다. 그 모든 분노의 순간 나는 투사가 되었다. 수업거부를 해서 친구들을 지키고 촌지 없는 학교를 주장하는 전교조를 위해 모금 광고를 내고 고등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유인물을 쫘악 뿌리며 선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전국노동자협의회에 들어가 부당함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편이 되어 무보수로 일했다. 여성 장애인 모임 활동비 지원을 위해 SNS에 글을 써서 모금을 했다. 의로운 분노에 삶을 쏟아 부은 대가로 얻은 신념이 있었다. ‘나의 삶은 정의롭다.’
사회 정의를 두고 벌어지는 거대담론과 명분 속에서 나의 신념은 나를 숨쉬게 했다. 교장과 싸워 친구들을 구해냈다는 생각은 나의 단골 무용담이 되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씨앗이 되고 있다는 신념이 주는 감각은 너무나 짜릿해서 나의 자부심을 계속 채워주었다. 거대담론이 흐르는 신념의 세상에서 딱 한 발 빠져나오면 나는 여전히 억울했다. 고3이라고 수업 거부를 반대했던 부반장은 과외 받아가며 공부하더니 성적이 올랐고 나는 수업 거부 후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불려가 화장실 갈 시간이 없고 여러 선생님들에게 구박을 받아 입술이 죄 터졌다. 전노협 시절 보수도 없이 과외를 해가며 생계를 유지하고 컵라면 먹으며 밤을 새워 건강이 무너져 내렸는데 내 친구들은 번듯한 직장 다니며 점점 잘 사는 것 같았다. 신념의 세상에서 흐르던 자부심이 사적인 관계에서 흔들릴 때마다 억울함이 요동치다가 요상한 힘으로 삐져나와 상대를 쳤다. 그 밑에 흐르는 신념 ‘내가 너희들보다 더 정의롭다.’ 저 신념을 바탕에 깔고 은근히 위치성 게임을 하는 내가 대인 관계를 유연하고 부드럽게 맺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덤으로 따라오는 중독적 감정.
억울함을 바탕에 깐 부당함에 대한 의분으로 은근한 훈계질을 일삼으니 공감이 필수적인 소통에 무지하고 무능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취약점을 감추어준 것이 리더 역할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부반장을 시작으로 고3 때 여학생 회장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주는 힘 때문에 웬만해선 관계 맺기에서 다툼이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이 내게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귀기울여 들어주면 시원하다고 고마워했다. 나를 그냥 ‘친구’로 대하는 친구들과는 종종 다툼이 일었는데 관계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뭐가 잘못인지 지적해줘. 그럼 내가 고칠게”라고 말하는 내가 내 친구들은 얼마나 재수없었을까.
억울함. 리더 역할을 하며 의분에 내 삶을 내어주었던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억울함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내 안에 그대로 있었다. 점점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고체화되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힐링스쿨에서 치유 과정을 거치며, 또 힐러로서 참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인 관계에서는 억울해도 여전히 찍 소리를 못하는 나에게 오랜 시간 용기를 불어넣는 사이 아주 조금씩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억울함’을 비로소 감각하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억울함을 감각조차 못 하다가 3일만에 감각할 수 있게 되더니 최근에는 하루만에 혹은 3분 정도만에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억울함을 일단 감각하고 알아주면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경험을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인기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새진리회’는 미디어에 ‘천사의 고지를 받은 죄인은 지옥간다’는 공포를 계속 흘려 넣어 세력이 무섭게 확장된다. 젊은 교주 정진석은 인터뷰에서 천사의 고지를 통해 신이 전하는 의도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은 더 정의로워져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가 다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며 착하게 보육원 동생들 돌보며 살던 그는 보육원을 나와야하는 고등학생 때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은 후 어떻게 교주가 되었을까. 지옥에 끌려가던 날 그가 말한다. “예언을 들은 후 계속 공포에 시달려왔어요. 끊임없는 공포에요.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타인의 죄를 방치할 수도 있다는 공포. 나는 그 고통 속에서 20년을 살았어!” 억울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을 향해 지독한 의분을 내뿜는 그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 휠체어를 탄 장애인 엄마와 휠체어를 뒤에서 미는 어린 딸이 즐겁게 산책을 하던 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들이 “에구, 저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다고…” 하며 혀를 끌끌 찼고 집에 온 딸이 엄마에게 물었단다. “엄마, 할머니들이 나한테 무슨 죄를 졌다는 거야??”
나의 억울함을 알아줄 때마다 발견되는 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 많은 비난의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내게 심어주었던 죄책감들이다. 그 죄책감들을 떠받치고 있는 게 대를 이어 내려온 온갖 분별의 신념들이라는 게 알아진다. 지옥이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옳지 못하다 생각되어 죄책감이 극성을 부릴 때마다 눈 앞에 지옥이 펼쳐졌다.
요즘 나는 거대담론이니 대의명분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것들로부터 살짝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 중독되었던 신념, 에고가 놀던 곳이라 조금 거리를 두는 게 나의 치유에 유익할 거 같기 때문이다. 타인의 억울함을 흡수하는 데 쓰던 모든 시간을 나에게 몰아주면서 나를 비난하는 부모의 자리에 나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부모를 세우며 산다. 그러고 사니 시간이 남아돌아서 물 쓰듯 쓰고 있다. 그래도 살아지고 사실 더 살 맛이 난다. 치유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