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후회해도 괜찮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왜 오랫동안 '양보'라는 방식을 택해왔을까.
그 결과로 억울해하는 경험들이 쌓이고 나중에는 화도 나면서.
양보를 택하면서도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우회적으로 컨트롤하는 '개피곤함'을
끝없이 감수하면서도 왜 '양보'를 놓지 못했을까.
관계 속에 있을 때 늘 '타인의 욕구'에 대개는 따라가는 패턴을 지녀온
내 모습을 꾸준히 바라보다가 '마음 약해서'라는 들고양이의 노래가 떠올랐다.
엄니가 아빠 돌아가신 후 시도 때도 없이 부르며 눈물 흘리던
엄니의 비극적 18번
"이걸로 돼지고기 한 근 볶아먹지"
"둘째 혼수로 담요 계 붓고 있는데 거기 먼저 내고 고기를 담에 볶아드리께"
저 대화가 두 분이 나눈 마지막 대화
아빠가 준 돈 5천 원으로 아빠가 원했던 돼지고기를 볶아드리지 못했던 엄니는
다음 날 돌아가신 아빠를 떠올리며 평생을 그 후회로 사셨다.
출장 가시기 전 잠자리를 요구하셨는데 대낮이라 민망해서 거절하셨던 것까지 얹어서..
10살 때부터 귀에 딱쟁이가 앉도록 엄니의 후회를 듣고 자란 나에게
저 후회의 낮은 파장 에너지가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선택 - 상대의 죽음 - 선택에 대한 후회 - 만회 불가능
'만회 불가능'이라는 결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뼈에 새겨질 후회를 피하기 위해 '선택'을 회피하게 했다.
선택권을 상대에게 계속 주게 되고 그 반복되는 경험 속에
조바심이 나고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민 내면아이의 아우성
선택의 순간 나를 미묘하게 억누르며 들려오던 내면의 목소리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에 대해
이제 나는 말한다.
"후회해도 괜찮아!"
그리고 기도한다. 오직 최고최선이 되도록.
나는 나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지지하고 격려하는 방식을 선택한 자
그 선택의 힘으로 회피를 돌파한 경험을 하기도 한 자
죽음은 나쁜가? 아니오.
죽음은 끝인가? 아니오.
엄니의 경험은 내 것인가? 아니오.
설사 내 경험이라도 나의 경험은 나인가? 아니오.
이 모든 경험은 누구의 설계인가? 나의 신성.
이 경험을 설계한 이유는? 어둠을 경험하여 내가 빛임을 기억하려고.
오래된 에너지를 흘려보낸 후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오래된 관계에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며.
나는 그 누구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여정을 존중합니다.
나는 오직 나에게로 나의 신성에게로 뚜벅뚜벅 걷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며 Re-member
어제 출렁 다리를 건넜습니다.
처음엔 밑이 보여 살짝 무서웠지만 앞을 바라보니
출렁이며 담담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 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rance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신)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