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그내 치유&성장 일기

왜 둥그내일까 1

둥그내 2021. 1. 23. 09:52

큰 언니와 19살 차이가 나다보니 8살에 첫 조카가 생겼습니다. 

너무 예뻐서 보러 갔어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살고 있었거든요. 

큰 언니네는 문방구를 하는 주인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고 있었죠. 

조카를 돌보다가 해가 져 언니네서 자고 가기로 했어요.  

큰 언니 오른쪽에 아기 조카, 큰 형부 왼쪽에 저 

나란히 누워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베개에 머리 닿으면 3초 만에 잠에 빠져 별명이 3초였던 저는 

자다가 매우 불쾌한 감각에 정신이 들어왔어요. 

큰 형부가 제 성기를 만지고 있더군요. 

슬며시 돌려 누웠지만 그는 매우 집요했습니다.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하고 목이 조이는 느낌이라 말도 안 나와 

잠을 자는 척 오히려 숨을 죽이게 되더군요. 

 

'더러운 공포, 수치심, 더러워진 나, 너 따위에게 좋은 게 가당키나 하냐'

 

2년 지나 아부지가 연탄가스로 직장 동료들과 객사한 후 

그 빈 자리를 그들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집을 잃었죠. 

엄마가 시집 간 둘째 언니 해산간에 김장 해주러 부재한 시간들 동안에는 

친구 집을 이 집 저 집 다니며 최대한 늦게까지 있다가 

세째 언니가 퇴근했을 것 같은 시간에 맞춰 집에 가곤 했어요. 

 

제발 따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그들은 나갈 생각이 없었고 

엄마는 큰 언니와 지독하게 싸우면서도 그냥 껴안고 살아가시더군요. 

큰 형부를 가장으로 섬기시면서..

 

20년 지나 엄마와 이제 좀 단둘이 살고 싶어서

잠긴 목에 조금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엄마와 다른 두 언니 앞에서 8살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말했어야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2차 가해의 순간. 

자신의 불안을 다룰 수 없으면 상대에게 온전히 머물 수 없음을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들이 알지 못함을 깨달았죠. 

 

20년이 또 흐른 어느 날 우연히 

당시 함께 노래를 하던 '목요일의 수다' 멤버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야, 내가 그 새끼 찾아가서 하이힐로 그 새끼 정수리를 찍어버릴까!" 

 

멤버들이 온전히 저에게 머물고 있음을 느꼈어요. 

깊은 위안을 받고 울음이 터지더군요.

치유와 정화의 순간 

 

그리고 3년 후 

돌아가신 지 40년 만에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얕은 비탈길을 부친은 오르고 저는 내려가다가 만났는데 

처음엔 저를 몰라보던 부친이 제가 막내딸이라고 막 울자 

그제서야 알아보고 부둥켜 안으시고는 함께 목 놓아 우셨습니다. 

 

 

얼마 후 저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꼬맹이는 수도 계량기 위를 덮은 동그란 뚜껑 위를 무대 삼아

자주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 꼬맹이를 따듯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느껴지더군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진 속 꼬맹이가 부르는 노래에요. 

그래서 제가 둥그내(둥근 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깨끗함과 더러움, 옳고 그름, 선과 악, 그 징하디 징한 이원론에서

살짝 한 발 내딛은 순간 바로 알게 되었어요. 

전 생애에 걸쳐 저 꼬맹이를 덮고 있던 '수치와 공포, 두려움'을

현실에 창조했던 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였음을. 

제가 그 숙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뛰어넘을 때까지

스스로 계속 그런 현실을 만들어왔더군요. 

 

전 생애에 걸쳐 저에게 숙제를 부여하고 

전 생애에 걸쳐 저를 치유해가는 동안 

이제 저는 이곳 지구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법칙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이기는 방법도 조금 더 알게 되었어요. 

돈을 중립적인 에너지로,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에너지로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성 에너지에 대해서도 중립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죄와 죄인이 분리되는 순간이었죠. 

 

나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수치심, 공포 등이 함부로 나를 해할 수 없습니다. 

매우 파장이 높은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를 

매우 파장이 낮은 두려움의 에너지가 쉽게 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계속 감사 에너지로 정화하면서 높은 파장으로 유지하는 것'

에너지 힐링에 대한 저의 정의입니다.

그 상태로 클라이언트를 만나요. 

그리고 나눕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당신을 해할 수 없어요. 

무엇을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목소리, 겁주고 협박하는 목소리,

정상을 내세워 이상하다며 손가락질하는 목소리

설사 그것이 당신 생을 관통하는 종교일지라도

그것에 당신을 내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 자체로 존귀한 존재이니까요."

 

저런 마음으로 그냥 클라이언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노래하는 꼬맹이를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봐요. 

그들이 어떤 폭력을 느낄 때 함께 머무르며 호흡해요.

게임의 법칙을 깨닫고 내가 주도하는 게임으로 바꿔

함께 이기면 좋잖아요.

 

제가 힐러가 된 이유입니다. 

제 꿈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