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그내의 삶

가방 사

둥그내 2020. 8. 21. 20:38

# 아마도 9살

“나 부반장 됐다!”

학교에서 돌아와 자랑스럽게 말하던 내게

엄마는 말했다.

“소풍 가면 선생님 도시락 싸느라 돈 들텐데

그런 건 뭐하러 해가지고..”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 골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있던 책상 앞에서 서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책가방을 내동댕이쳤다.

아부지가 조용히 따라들어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내 손에 5천 원을 쥐어주셨다.

“우리 막내딸 책가방이 많이 낡았구나.

이걸로 새 가방 사~”

아부지의 이 한 마디가 평생을 간다.

힘이 들 때마다 내 존재를 위로하는 소리로.

# 아마도 7살

오랜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여름날

아부지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일영 계곡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입석이 있던 시절

그 찌는듯한 더위와 꽉 들어찬 사람들 속에

이 작은 몸이 눌리는 것 같을 때마다

아부지는 내 앞에 서서

세상의 무게로부터 약간의 공간을 만드느라

힘을 쓰고 계셨다.

그러던 아부지가 안 보였다.

아부지를 찾아 다른 객차로 향하다가

반팔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채

출입구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멀리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아부지를 발견했다.

길게 난 쇠 손잡이를 잡고 몸을 1/3 정도 내민

아부지의 몸과 셔츠가 위태롭게 휘날렸다.

나는 아부지가 어딘가로 날아갈까봐 겁이 나면서도

어딘가로 시선을 던진 아부지의 표정이

너무나도 가볍고 아련하고 편안해보여

아부지를 부르지도 다가가 잡지도 못한 채

그냥 몇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부지의 그 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 그리고 10살

선생님이 집에서 전화 왔다며 집에 가보란다.

수업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일까..

집에 가는 동안 가슴이 콩닥거렸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족들이 있고

얼굴들이 표정이 다들 이상했고

나는 온몸에 한기를 느꼈다.

출장 갔던 아부지가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났단다.

다른 두 분과 달리 아부지는 퇴마루까지 기어나와

엎드린 상태로 가셨다.

숨을 쉬고 싶으셨겠지...

장례식장에서는

사람들의 ‘저 어린 걸 두고 ㅉㅉ’ 소리가 싫어

철없다 소리 들어가며 헤실거리고

아부지 마지막이라며 입관한 모습을 보라했을 때도

코와 귀를 솜이 틀어박고 있는 장면을 기억할뿐

울지 않는 어린애였던 나는

벽제 화장터 불구덩이로 아부지를 밀어넣을 때

비로소 펄쩍 펄쩍 뛰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진땀이 다 빠져나간 나는

세째 언니랑 나란히 화장터 계단에 앉아

굴뚝으로 피어오르는 시커먼 아부지 연기가

하늘로 날아 흩어지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립고 슬프면서도 후련한 마음

어쩌면..

일영 기차 안에서 아부지가 바라보던 그곳

그 영혼의 집으로 가신 걸

그 어린 나이에도 직감했던 것 같다.

아부지는 내게 잠깐이지만 그렇게

‘사랑’을 알려주려고 머물다 가셨나부다.

앞으로 만만치 않을 영혼의 숙제를 잘 해내고 이겨내라고.

그리고 40년만에 내 꿈에 오셨다.

 

20204.14